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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가볼만한 곳- 노동당사&백마고지 전투지

이치핏 2015. 7. 11. 00:59

휴전선에 인접해 있는 철원은 생각보다 작은 동네였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안보관광지 뭐 그런곳도 있었는데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힘들게 온만큼 가본곳이

 노동당사 해방이후 한국전쟁이전까지 여기가 북한땅이었는데 북한에서 노동당 당사로 쓰던 건물이 뼈대만 남아 있었다.

 

 

 

전쟁중에도 저정도 형체가 남아있는걸 보면 얼마나 견고하게 지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매시간마다 땅굴관광을 위한 버스가 출발하는데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휑하니 가버리는 바람에 땅굴은 그냥 포기했다.

 

어차피 임진각에서도 본거라 그닥 땡기지는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버스가 들어가는 출입구를 찍었더니 대번에 보초서던 군인동생이 쫒아와서 사진을 지우달라고 했다.

 

이건물을 바라보고 왼쪽은 절대 촬영 금지이다.

 

 

 

중간중간에 벽이 이렇게 허물어 진 것은  전쟁때문에도 긇지만 여기에 있는

철근을 떼다가 팔면 돈이 되니까 와서 철근을 뜯어가서 이기도 했다.

 

여기서 수많은 양민들과 애국지사를 고문하고 학살해왔기 때문에 아주 악명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뭐 만만찮게 악명 높은 곳은 서울에도 있지만 말이다.

 

 

 

 

 

 

노동당사에서 조금만 더 가면 백마고지 역이랑 전투지가 나온다.아마 우리나라 최북단 관광지가 아닐까?

 

백마고지전투

 

[내용]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됐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 제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 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였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만 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 닌호아·투이호아·캄란지역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 한국민족문화 대 백과사전에서 발췌

 

 

 

 

6.25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다곤 도저히 상상이 안될만큼 조용한 공원이었다.

 

구경오는 사람도 없고 그냥 외박나온 군인 몇몇이 어머니나 가족들을 데리고 온듯했다.

 

 여기서 재미있는건 같이온 젊은 여자애들이 있는데 표정만 보면 여친인지 여동생이지 대충 짐작이 갔다. ㅋㅋ

 

 환하게 웃고 있으면 여친이고 귀찮다는 표정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따라다니면 여동생같았다.

 

 왜냐면 궁시렁 거리며 따라가는 애들은 엄마도 같이 있었으니깐.

 

 

 

나는 백마고지 하니 우선 영화 '고지전' 이 생각났다.

 

 영화에서는 애록고지지만 이 백마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한 영화라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때의 치열한 전투를 상상 할 수가 있다.

 

 

 

언덕을 따라 쭉 올라오면 백마고지 전투 기념비랑 전사자비가 있다.

 

이사람들을 다 희생시킨게 단순히 북한군과 중공군이었을까? 

 

영화장면처럼 책상머리에 앉아서 영혼없이 펜대나 굴리는 윗대가리들이 아닐까?

 

 

 

기념비를 뒤로하고 산책길을 쭉 따라가다보면 백마고지를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아무래도 백마고지를 직접 갈수는 없는 모양이다.

 

 

 

 

저기 보이는 언덕이 바로 백마고지..

 

저 언덕이 뭐라고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그많은 사람이 죽어야만 했을까?

 

지금은 나무도 자라고 해서 평범한 산이지만 그당시 하도 폭격이 심해서 초목이 다 죽어버리는 바람에

허연 민둥산이 드러나 꼭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계속 보고 있으니 뭔가 숙연해졌다.

 

주변이 뻥 뚤려있으니 어디 숨을 곳도 없고 그냥 서로 총알받이가 되었을 것이다. ㅜ.ㅜ

 

어쨌거나 전쟁나면 힘없는 사람들만 다 죽어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