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라바드 일기

'22-04 그림 배우러 갔다 졸지에 작가(?) 된 썰

이치핏 2023. 12. 24. 02:38

인도 오기 전 친했던
직장 동료 A 와 그녀의 남편 B를 만났다.
 
B는 미쿡 애 인데
페이스북에 어느 나라든 익스펙츠 그룹이 있으니
하이데라바드에도 있을거라고
검색 해 줬다.
 
가입해라고 하길래 멋도 모르고 가입함. 
 
가면 외국인 친구 사귀는 건가?
 
영어도 못하면서 쪼큼 설렜다. 
 
하이데라바드에 도착해 들어가 보다가
그림교실 홍보글을 발견!! 
DM을 보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서양 할배인데
좀 무섭긴했다.
 
벗뜨.
여기선 도무지 취미생활을 할만한걸 찾기가 힘들고
텔루구어는 일자무식이라
영어라도 통하면 다행이었다. 
 
 
할아버지 이름은 션인데
자기아파트에서 소규모로 수업하고 있다고
일단 와서 그리는 수준보고
거기에 맞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 
 
"나 영어를 잘 못하는데 괜찮겠어?"
"나도 영어랑 맨날 씨름해 ㅎㅎㅎ"
 
음 스페인 그쪽인가? 했다. 
 
할배 구글 맵도 쓸줄몰라
이상한 데다 좌표를 찍어 줬다.
 
베티나 굴라팔레 라고...
 
그게 아파트 이름인줄 알고
기사보고 가자고 했더니
거긴 동네 이름이라고 나보고 주소 똑바로 안댔다고
한소리 또 하면서 짜증냈다.
 
이시키는 결국 내가 짤라버림.
 

쌤..죄송..초상권 필요없쥬?
 
보자마자 기차 화통 삶아 먹은 소리로
격하게 환영하면서 허깅을 하는 이 할배샘. 
 
영국 어디 사투리 엑센트로
사람을 당황 시켰다. 
 
영국사람이 마구 쏟아내듯이
쏼라 거리니까  멘탈이 가출해버렸다. 
 
알고보니 멘체스터 출신이라고..
 
근데 왜 영어랑 늘 스트러글 한다는 것이야..
 
그때 이 자리에
런던에서 온 줄리라는 아줌마가 있었다. 
 
자기 애가 하라는 온라인 수업은 안하고
맨날 드러누워 탭만 쳐다본다고
하소연을 하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있잖아. 니가 여기 열심히 다니면
그림도 늘겠지만 영어실력도 늘거야. 
잘 해봐."
 
그래 언어가 중요하겠어.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게 중요하지
 
선긋기 명암 부터 열심히 그려보자 하고 결심. 
 
그러나 기초가 얼굴 그리기 부터였다. 
 
사람얼굴 그리는 방법..
 
눈을 하나 그리고 그걸 기준으로
다 매져~매져~매져~
 
 
눈 하나를 기준으로
다 재서 사람얼굴을 그리면 된단다. 
 
나보고 그리고 싶은 사람 얼굴 사진을 찾으란다. 
 
그래서 모델사진 들이밀었더니 
 
줄리가 "와우~쏘 핫.."
 
이럼서 눈이 휘둥그래 졌다. 
 
 결국 옆에서 도와주고 어쩌고 해서
사람 얼굴 하나 그림. 
 

이게 뭐얔 ㅋㅋㅋㅋㅋ
 
원래는 잘생긴 모델이
왕 느끼남이 되어버렸다!!
 
 사람 얼굴 완성했으니
이젠 내가 아티스트란다. 
 
그러면서 의무적으로
전시회에 작품을 내라는 거였다. 
 
"왓? 전시회? 무슨 전시회?"
 
 한달 뒤에 전시회를 열기로 했는데 
 
코로나 락다운 때문에
대도시에서 일하는 인도인 이주 노동자들이
오도가도 못해
고향까지 수천킬로미터를 걸어서
이동 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주제로 여는 전시회란다. 
 
이동을 하면서
교통사고나 여러가지 이유로
사망자가 많이 나왔는데
그게 잘 알려지지가 않았다고.
 
나름 의미 있는 전시회긴 했다.
 
내가 그런걸 그릴 실력이 안된다는게 문제지. 
 
도저히 못한다고 했지만 
수채화로 그냥 그리면 된다고
별거 아니란 식으로 말했다. 
 
"저기. 나 수채화 한번도 안해봤거든요."
"돈워리. 내가 다 도와줄거야."
 
 다른 회원들은 작년 10월 부터
작품준비를 했었다고 하는데
내가 전시회 직전에 멋도 모르고 들어간 거였다. 
 
이 할배는
한작품이라도 더 내는게 목적이었고. 
 

 
 

 
 말도 심하게 안통하지만
할배가 손봐주고 시키는 대로 또 어찌어찌 그림.
 
퀄리티는 아몰랑~
 
결과물이 나온게 중요하지 암..
 

 
그리고 대망의 전시회날!!
 
레스토랑에서 선데이브런치를 먹으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식인데
인원제한이 있어서
미리 신청을 하고 돈을 내야 했다. 
 
이때만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
 
두사람 갈게요 하고
남편이랑 내것만 냈다.
 
그런데..

어느틈에 내가 전시회한다는
소문이 쫙 퍼져 버려서
남편 회사 직원들과 가족들이
방문을 한 것이다. 

바야흐로 락다운이 풀린지
얼마 안되는 시점.

다들 답답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텐데
인도 온지 얼마 안되는 신참 아지매가
전시회를 한다고 하니 신기했는지
너도 나도 와 주셨다. 
 

 
와주신건 넘 감사했지만
솔직히 개민망 그 자체였다.
 
애개개 저게 무슨 작가...
라고 할법도 했지만
 다들 와 멋있다하면서
칭찬해 주고 꽃다발도 바리바리 주고 가심.
 
그래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니까 뭐..
 
이게 한국인의 정인가. 찡 하다~
 
다만 나때문에 오신분들
뭐라도 먹을걸 대접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 참 민망한 상황..
 

 
파티장인지 전시회인지
뭔가 애매하지만 성황리에 진행 되고..
 

 
정신차리니
참여작가들과 사진찍고 있네.

이제 너도 작가~
이럼서 ㅎㅎㅎ
 
오신 한국 사모님들 중
한분이 선생님 그림을 팔아주셔서
쌤이 아주 기분이 좋으심. 
 
그 뒤로 이 할아버지에게 그림은 배우고 있는데
다들 영어가 늘었냐고 물어본다. 
 
늘긴 늘었다.
영어가 아니라 눈칫발이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