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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천년여행길- 저항정신의 상징 홍주성

이치핏 2014. 6. 29. 23:00

홍주성

 

사적 제231호. 지정면적 37,009㎡, 둘레 약 800m. 동문[朝陽門]·아문(衙門)·산성(山城)을 포함한다. 이 성은 백제시대의 주류성(周留城)에 비정되고 있으나, 처음 축조된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시대까지도 개축기록이 없었다.

다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성의 둘레가 533보2척(1보는 6척)이며,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각 관읍의 읍성을 새로운 규식(規式)에 맞추어 수축하게 하였을 때, 이 성도 1451년(문종 1)에 새로 수축하였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 4,856척, 높이 11척이며, 여장(女墻)의 높이는 2척으로 608개에 달한다. 적대(敵臺) 24개 중 6개, 문 4개 중 1개가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이 없으며 성안에는 우물 두 곳이 있고, 해자(垓子 : 성밖에 둘러 판 못)는 파지 않고 본래보다 물려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현종 때 한계수(韓桂洙)가 중수하였고, 1824년(순조 24)에 진장(鎭將) 김계묵(金啓默)과 목사 이헌규(李憲圭)가 수리하였다고 기적비(紀蹟碑)에 적혀 있다.

또, 1870년(고종 7) 목사 한응필(韓應弼)이 조양문·경의문(景義門)·망화문(望華門)·관영(官營)을 지었는데, 이 중 조양문은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로 정면 3칸의 문루로서 흥선대원군이 친필을 하사하였다. 현재의 조양문은 1975년 완전 해체 복원된 것이다.

이 성은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閔宗植)·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안병찬(安炳瓚) 등이 이듬해 5월 19일 1,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6문의 화포로 공격하여 덕산(德山)으로 퇴각시키고 점령한 전투로 유명하다.

문종 때에는 이 성에 문이 4개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래는 3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구조상 남문이 없는 것은 특이하며 북문에는 문루가 없다.

이 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읍터로서 큰 변동이 없었다는 점과 조선 초기 새로운 축성규식에 의한 축성물이라는 점에서 연구와 보존의 가치가 크다.

이 성은 1978년 10월 7일 강도 5°의 지진으로 성곽의 일부가 무너져 국비의 지원을 받아 1979년부터 복원작업에 착수, 1982년 부분적인 보수를 완료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주성 [洪州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홍주성은 우리나라 아픈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병전쟁,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되고 소실되어 남아있는 건물은 거의가 다 복원된 것이었다.

 

 

 

전통시장을 벗어나 천년여행길을 걷다보니 당당하게 서있는 성문이 나왔다. 1906년 의병들이 일본군을 몰아낸 홍주성전투로 유명한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이다.

 

 

 

 

 

이문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한 의병들이 일으킨 전투에서 심하게 훼손이 되었고 옹성또한 일제시대때 소실이 되었다. 1975년에야 다시 복원되었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의병정신의 상징이라 그런지 존재감만은 서울 남대문 못지 않았다.

 

 

 

그리고 홍주동헌의 외삼문인 홍주아문. 흥선대원군이 현판의 글을 써서 하사했으나 한국전쟁때 소실되고 그 후로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지금은 홍성군청의 대문역할을 하고 있다.

 

 

 

 

홍주아문을 들어서니 엄청난 크기의 느티나무가 나를 반겼다. 이 느티나무는 공민왕의 왕사인 태고보우라는 스님의 보호수였다. 홍성은 이 태고보우의 고향이었는데 그가 공민왕의 왕사가 되면서 이 고장은 홍주목으로 승격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조선시대와 현재의 행정기관이 한곳에서 공존하는 곳은 이곳 홍성 밖에 없을 것이다. 군청 바로 옆에는 조선시대의 동헌인 안회당이 있었다. 이곳은 홍주군수와 목사의 행정 집무실이었다. 이곳 현판역시 대원군이 하사하였으나 광복이후 소실도었고 다시 복원 한 것이다.

 

 

 

 

 

 

풍류를 즐기던 우리네 조상님 아니랄까봐 역시나 안회당 뒤쪽으로는 근사한 정원과 연못 그리고 아담한 정자가 있다. 여하정이란 이름의 이 정자는 대대로 홍주목사들의 휴식공간이었다.

 

 

 

 

성벽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이렇게 바닥에 흩어져 있는 돌 조각들이 보인다. 홍주성은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태종째 석성으로 개축을 했다. 그런데 성벽을 쌓다보니 석재가 부족하자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던 조선정부는 절에 있는 탑같은걸 부숴 성벽의 재료로 삼았다. 그때 남은 석탑의 잔해물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작년에 복원된 홍주성의 남문인 홍화문.

 

 

 

예로부터 성의 남문 앞에는 나쁜기운을 막기위해 나무를 싶어서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홍주성의 남문앞은 빌딩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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